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남아프리카 공화국/역사 (문단 편집) === 공화국 수립과 아파르트헤이트의 전성기(1960년~1974년) === 이렇게 되자 영국과의 관계는 아예 틀어졌는데, 일단 영국 본토 정부에서는 남아프리카 연방의 인종차별 정책을 탐탁찮아 했던데다가 보어인 강경파는 [[영연방 왕국]] 체제를 불만스러워했는데, 1960년 2월 3일 [[해럴드 맥밀런]] 영국 총리가 남아공을 방문해 대놓고 '변화의 바람'이란 연설을 해버렸다. >[[해럴드 맥밀런]]은 어느 때에도 침착 냉정하기로 유명했지만, 그런 맥밀런마저도 남아프리카 총리의 초청을 받자 흥분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헨드리크 페르부르트|페르부르트 박사]]는 아파르트헤이트를 종교처럼 숭배하고 "만사에 오직 나만이 옳다"는 신념을 가진 "끔찍한 생각"의 소유자였다. 이날 맥밀런은 남아프리카 연방 의회 앞에서 아프리카너 정권에 도전하는 연설을 했다. 긴장한 나머지 연설 직전에 몸이 아플 정도였다. 연설 자체는 철저한 준비를 거쳤다. 아프리카에는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고 그는 역설했다. 민족적 자각은 정책상 고려해야 할 정치적인 사실이었다. > >그는 아프리카너 민족주의를 아프리카 최초의 민족주의라고 찬사를 보냈지만, 여기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고 했다. 계속해서 불평등을 감내해야 한다면 흑인들은 공산주의로 돌아설 것이었다. 맥밀런은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정부는 개인의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고 못박았다. 아프리카의 다른 지역에서도 영국의 정책은 변화하고 있으며, 따라서 "여러분에게 어려운 상황이 될 수 있다"고 꼬집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800219|#]] 하지만 [[영국]]은 이빨 빠진 [[호랑이]]었고, 나머지 강대국들이 멀고 먼 남아프리카까지 군사 개입을 할 리가 없었던 걸 아는 남아공 정부는 대놓고 인종차별 정책을 그대로 밀고 갔다. 이미 페르부르트는 1960년 1월 20일에 "영연방 왕국으로부터 공화국으로 이행하기 위한 국민투표를 10월 5일에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영국계 주민의 평균 연령이 더 높고 젊은 연령층이 적은 것을 고려해 투표 연령을 18세로 내리고, 독일령이었고 [[독일]]계와 네덜란드계 보어인들이 대다수였던 [[나미비아]]까지 본토의 일부로 포함시켜 투표하는 것이었다. 결국 5% 차이로 [[영국 국왕]] [[엘리자베스 2세]]의 남아프리카 연방 국가원수 지위를 박탈하는 것이 결정되었고 1961년 3월 15일 [[영연방]]에서 탈퇴를 선언, 5월 31일에 국체를 정식으로 공화국으로 전환하여 '''남아프리카 공화국'''(남아공)을 선포해 영국과 완전히 결별했다.[* 마지막 총독 스와르트가 그대로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국기 중앙부에 그려진 [[유니언 잭]]은 그대로 남아있었다가 후 1994년 국기변경 이후로 사라졌다.] [[파일:519eba34143c1b56738b38710d692524.jpg]] [[프리토리아]]에서 열린 공화국 선포식 (1961년 5월 31일) 1960년 11월 ANC의 지하 회의에서 사령관에 지명된 [[넬슨 만델라]]는 영연방 탈퇴 반대, 인종 차별 철폐와 민주 헌법 제정을 요구하며 저항 운동을 조직, 5월 29일부로 재택 파업에 들어가 흑인 노동자의 60~75%가 동참했지만, 당국의 탄압으로 파업은 실패로 돌아간다. 이후에도 넬슨 만델라 등은 지속적으로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에 저항하였다. 12월 9일 ANC 의장 [[알베르트 루툴리]]가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1962년 귀국해 무장 투쟁을 지휘하던 만델라가 8월 5일 체포되어, 이후 27년간 케이프타운 앞바다의 로벤섬 교도소에서 수형 생활을 하게 된다. 1961년 9월 26일에는 [[FIFA]]로부터 회원 자격을 정지당해 [[FIFA 월드컵|월드컵]] 예선조차 나가지 못하고, 1962년에는 UN으로부터 남아공과의 단교, 제품 보이콧, 수출입 금지, 선박과 항공기 보이콧 등을 요구하는 결의안이 통과되어 본격적으로 국제 사회로부터 제재를 당하게 된다. 1964년 6월 5일에는 [[만국우편연합]](UPU)에서도 쫓겨났고, 8월 18일에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로부터 [[1964 도쿄 올림픽]] 출전 금지당하는 수모를 당하는 등[* 이후 28년간 올림픽 출전이 금지된다. 1970년 5월 15일에는 IOC로부터 아예 제명당한다.] 국제 사회로부터 갖은 [[왕따]]를 당한다. 그럼에도 1966년부터는 남아공 내에서 흑인세력의 봉기가 거의 자취를 감추었고, 경제도 호황기에 접어들어 이 해부터 1974년까지는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의 안정기로 평가된다. 1966년 9월 6일 페르부르트 수상이 암살당하자 취임한 법무장관 요하네스 포르스터는 페르부르트가 온건파로 보일 만큼(...) 강경파로, 2차 대전 당시에는 친나치 행보를 보인 인종주의자였다. 포르스터 내각 하에서 남아공의 경찰국가화는 가속되었다. 1966년 5월 31일 프리토리아에서는 5만 시민이 참석한 가운데 공화국 수립 5주년 경축 대회와 열병식이 대대적으로 열렸고, 12월 14일 푸케 농업장관은 "국제사회가 설령 그 어떤 제재를 가한다 할 지라도, 남아공은 최소 3년은 문제 없이 버틸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쳤다. 1972년을 기점으로 포르스터 정권은 '계몽적 인종 정책'을 내걸고 일상 생활에서의 인종 분리인 小아파르트헤이트 관련 법이 일부 완화시켜 유색인종의 경제수준을 향상시키는 한편, 백인과 유색인종 간 영토 분리인 大아파르트헤이트를 촉진하는 정책 전환을 선전하였으나, 이러한 조치에 백인 강경파는 정책 후퇴, 대다수 유색인종도 기만적이라며 반발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